발레 공연 포스터에서 흰 드레스 차림의 발레리나가 안개 낀 숲속에 서 있는 이미지를 본 적 있다면, 십중팔구 그게 지젤이다. 백조의 호수만큼 유명하지는 않아도, 발레를 조금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지젤을 더 높이 치는 경우가 많다. 왜인지, 한번 파고들어 보자.
180년 넘게 살아남은 이유
지젤은 1841년 파리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80년도 넘은 작품이다. 대부분의 발레 작품이 유행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생각하면, 이 작품이 아직도 세계 주요 발레단의 시즌 레퍼토리에 들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범상치 않다.
초연 당시 주인공 지젤을 춘 사람은 카를로타 그리시라는 이탈리아 발레리나였다. 그녀의 연인이자 스승이던 무용수 쥘 페로가 솔로 장면 안무를 직접 맡았는데, 그 덕분인지 주인공 캐릭터에 유독 생동감이 넘쳤다고 한다. 초연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이었고, 파리 전체가 지젤 열풍에 휩쓸렸다.
작품이 오래 살아남은 데는 구조적인 이유도 있다. 1막은 마을 처녀가 사랑에 속아 실심해 죽는 현실적인 드라마, 2막은 그 영혼이 밤마다 무덤에서 일어나 남자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윌리(Wili)들의 세계로 넘어간다. 낮과 밤, 현실과 환상, 사랑과 복수가 교차하는 구성이라 보는 내내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

발레 팬이 지젤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
지젤은 발레리나의 기량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1막에서는 순진하고 활기찬 시골 소녀를 연기해야 하고, 2막에서는 죽은 영혼의 고요하고 초월적인 움직임을 보여줘야 한다. 같은 무용수가 전혀 다른 두 결을 한 공연 안에서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2막에서 군무진(코르 드 발레)이 일렬로 정렬해 같은 동작을 물결처럼 반복하는 장면은 지젤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흰 낭만형 튀튀를 입은 무용수 20여 명이 안개 속에서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은, 처음 보는 사람도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답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그리고 2막 후반부, 지젤이 자신을 배신한 알브레히트를 구하는 장면. 복수의 여왕인 미르타의 명령을 거스르고 그를 지켜내는 그 순간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죽었으면서도 그를 용서하는 지젤의 행동이 관객 입장에서는 답답하기도, 애처롭기도, 결국에는 숙연해지기도 한다. 공연이 끝나고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다.
처음 관람한다면 이것만 알고 가자
지젤을 처음 보는 거라면 예습이 생각보다 도움이 된다. 줄거리를 알고 가면 세부 동작에 더 집중할 수 있고, 감정 이입도 훨씬 잘 된다.
몇 가지만 기억해두면 충분하다. 1막의 꽃잎 점치기 장면(그가 나를 사랑할까, 사랑하지 않을까)은 지젤의 순수함을 보여주는 대표 장면이니 놓치지 말 것. 그리고 1막 막바지에 지젤이 광기에 빠지는 장면(Mad Scene이라고 부른다)은 발레리나의 연기력이 폭발하는 구간이니 집중해서 볼 것.
2막에서 윌리들이 등장할 때의 조명과 무대 효과는 공연마다 차이가 크다. 국립발레단 버전은 비교적 현대적인 연출, 볼쇼이나 로열발레단 버전은 고전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영상으로 미리 비교해 보면 더 재밌다.
공연 시간은 보통 2시간 내외, 인터미션이 한 번 있다. 2막 분위기가 워낙 몽환적이라 졸릴 수도 있는데, 그래도 끝까지 버티는 게 맞다. 마지막 장면을 보지 않으면 반은 본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