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무대에서 "불꽃"이라는 단어를 진짜로 쓸 수 있는 무용수가 몇 명이나 될까. 나탈리아 오시포바(Natalia Osipova)는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점프가 너무 높아서 촬영된 영상이 합성처럼 보인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발레리나. 로열 발레단 수석무용수로 20년 가까이 세계 무대를 누비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정리해봤다.
모스크바에서 런던까지, 그녀의 시작
1986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오시포바는 어릴 때부터 체조와 무용을 병행했다. 볼쇼이 발레 아카데미에 입학한 건 11세. 그리고 19세가 되던 해, 전 세계가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다. 볼쇼이 발레단에 입단해 갈리나 울라노바 이후 가장 어린 나이에 수석무용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무대 위 그녀의 강점은 기술적 완성도보다 에너지에 있다. 바가노바 기법 특유의 유연성과 러시아 발레 특유의 드라마틱한 표현력이 합쳐지면서, 그녀의 무대는 보는 사람이 숨을 참게 만드는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볼쇼이에서의 커리어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그녀는 더 큰 무대를 택했다. 2013년 영국 로열 발레단으로 이적. 런던 왕립오페라하우스(ROH)를 홈 무대로 삼고 세계 투어를 이어가고 있다.

"점프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
발레를 취미로 시작했다면 한 번쯤은 그랑 쥬테(grand jeté)에서 막힌 적이 있을 거다. 공중에 뜨는 순간 중심이 흔들리고, 착지하면서 소리가 크게 나는 그 동작. 오시포바의 그랑 쥬테는 체공 시간이 다른 무용수들보다 유독 길다. 실제로 스포츠 과학 분석팀이 그녀의 점프를 측정했을 때,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체공 시간이 데이터로 확인됐다.
비결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전직 체조선수 출신답게 근력과 탄성이 발레리나 평균을 크게 웃돈다. 둘째, 공중에서 팔과 등 근육을 순간적으로 조여 정점 높이를 유지하는 테크닉을 쓴다. 겉으로 보이는 건 우아함이지만, 그 안에는 운동선수급 신체 조건이 받치고 있다.
취미 발레를 하는 입장에서 그녀를 보는 재미가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오시포바는 "타고난 유연성보다 트레이닝이 모든 걸 바꾼다"는 말을 여러 인터뷰에서 반복했다. 발레를 어른이 되어 시작한 사람들에게 그 말은 꽤 힘이 된다.
그녀가 주목받는 작품들
오시포바 하면 빠질 수 없는 작품이 <지젤(Giselle)>이다. 지젤은 1막에서 순수한 시골 소녀, 2막에서 죽음 이후 정령으로 변하는 이중적인 역할이 핵심이다. 대부분의 발레리나들이 2막에서 힘에 부치는 데 반해, 오시포바의 2막은 오히려 더 강렬해진다. 정령이 됐을 때의 차갑고 비현실적인 움직임은 그녀가 얼마나 연기와 테크닉을 함께 끌어올리는지를 보여준다.
<돈키호테>의 키트리 역도 그녀 커리어의 대표작이다. 플라멩코와 발레가 섞인 이 작품은 3막 그랑 파드되에서 32회 푸에테(fouetté)를 선보이는 장면이 하이라이트. 오시포바는 이 장면에서 단순히 회전 수를 채우는 게 아니라 매 회전마다 표정과 에너지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컨템포러리 발레에도 왕성하게 참여하고 있다. 아크람 칸, 아서 피타 같은 현대 안무가들과 협업하면서 클래식 발레의 틀을 넘나드는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로열 발레단의 유튜브 채널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영상들이 많으니, 그녀의 무대가 궁금하다면 가장 쉽게 접근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