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오페라 발레단 역사상 아시아 최초의 에투알. 이 수식어만으로도 충분해 보이는데, 박세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것도 모자라, 무대 전체를 직접 설계하는 사람이 됐다.
무용수이자 기획자, 두 개의 왕관
2022년 처음 한국 관객에게 ‘에투알 갈라’를 선보인 이후, 박세은은 매년 공연 기획과 캐스팅을 직접 총괄해왔다. 2025년 7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파리 오페라 발레 에투알 갈라 2025’는 역대 최대 규모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 소속 에투알 10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박세은의 말을 빌리면 "10명의 에투알이 동시에 모이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프리마 발레리나가 갈라 기획까지 맡는 경우는 흔치 않다. 무대에 오르는 것과 무대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세은은 원래 공연을 ‘보는’ 것도 극도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보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런던, 벨기에로 망설임 없이 날아가던 습관이 쌓여 자연스럽게 기획자의 감각이 됐다. 한국 관객에게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그것을 현실로 바꿨다.

출산 후 오히려 깊어진 무대
박세은은 에투알 등극 이후 결혼과 출산을 경험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지만, 정작 본인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딸이 생기고 나서 오히려 춤이 단순해졌다"는 것이다. 잡념이 사라지고, 연습 시간이 줄어드니 밀도가 높아졌다. 무대에서 긴장보다 여유를, 에너지보다 감정의 깊이를 더 챙기게 됐다고 했다.
이게 단순한 긍정적 포장이 아니라는 건, 그가 참여하는 작품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다. 2025-2026 시즌에는 ‘지젤’을 맡는다. 지젤은 발레 레퍼토리 중에서도 무용수의 감정 표현이 가장 극단적으로 시험받는 작품이다. 순수한 처녀가 배신당해 죽고, 유령이 되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킨다는 이야기. 몸이 아무리 좋아도 감정이 실리지 않으면 빈 껍데기가 되는 작품이다. 박세은이 지금 이 시점에 지젤을 선택한 것은 그냥 타이밍이 아닐 것이다.
프랑스 발레의 정수, 그리고 감정
박세은이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처음 발을 들인 건 2011년이다. 군무로 시작해, 군무 리더, 솔리스트, 제1무용수를 거쳐 2021년 에투알이 됐다. 10년이다. 356년 단 한 번도 아시아인에게 열리지 않았던 자리를 박세은이 처음 차지했다.
그 비결을 물으면 언제나 같은 답이 나온다. 테크닉이 아닌 감정 표현. 자신이 클래식 발레에 빠지게 된 계기가 루돌프 누레예프의 작품이었는데, 누레예프는 감정선이 핵심인 안무가다. "스텝과 동작이 아무리 많아도 감정이 빠지면 무용수가 기계처럼 보인다"는 게 그의 오랜 신념이다.
취미로 발레를 배우는 사람에게도 이 관점은 유효하다. 동작 하나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보다, 그 동작 안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 박세은이 10년 걸려 깨달은 것이 사실 레슨 첫 달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라는 게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