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발레를 본다고 하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진짜 발레 마니아들은 링컨센터 안의 작은 극장, 데이비드 H. 코크 시어터를 먼저 찾는다. 그곳이 바로 뉴욕 시티 발레단(New York City Ballet, NYCB)의 집이다. 창단 이래 70년 넘게 이 무대는 세계 발레의 흐름을 바꿔온 무대였고, 지금도 그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발란신이 만들어낸 아메리칸 발레의 정체성
뉴욕 시티 발레단 이야기를 하면서 조지 발란신을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 출신의 안무가 발란신은 1948년 이 단체를 공동 창단하며 기존 유럽 발레와 확연히 다른 스타일을 세상에 내놓았다. ‘네오클래시컬 발레’라고 불리는 이 스타일은 스토리와 무대 장치를 최대한 걷어내고 음악과 움직임 자체에 집중한다.
덕분에 발란신의 작품에는 화려한 왕자와 공주 대신 순수한 신체의 선과 음악의 구조가 남는다. 그의 대표작 <주얼스(Jewels)>는 에메랄드, 루비, 다이아몬드 세 파트로 나뉜 세계 최초의 ‘추상 발레’로 불리며, 오늘날까지 NYCB 레퍼토리의 핵심을 이룬다. 발란신은 "발레는 여성이고, 남성 무용수는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존재"라고 말할 만큼 여성 무용수를 중심에 뒀는데, 그 철학은 NYCB의 문화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현재도 각 시즌마다 발란신 작품이 20편 이상 올라갈 정도다. 단순히 오래된 유산이 아니라, 지금도 현역으로 무대를 이끄는 레퍼토리들이다.

미스티 코플랜드가 아닌, NYCB만의 스타들
NYCB는 ABT(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와 자주 비교되지만, 그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ABT가 미스티 코플랜드처럼 강렬한 개성과 드라마틱한 스토리 발레로 유명하다면, NYCB는 앙상블의 정밀함과 스타일의 통일감으로 승부한다. 그래서 NYCB의 스타들은 따로 이름을 내세우기보다는 작품 안에서 빛난다.
그 중에서 최근 가장 주목받는 무용수 중 한 명이 타리 무어(Tiler Peck)다. 2009년 프린시팔이 된 그녀는 20년 가까이 NYCB의 간판 발레리나로 활약하며 발란신 레퍼토리의 계승자로 불린다. 발끝의 정확성과 음악성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으며, 그녀의 무대를 보기 위해 일부러 뉴욕을 찾는 발레 팬들도 있을 정도다. 또한 젊은 세대에서는 인디아 브래들리(India Bradley)가 급부상 중이다. 2022년 역대 최연소 프린시팔 중 한 명으로 승급된 그녀는 NYCB의 새로운 얼굴로 자리잡고 있다. 팬들이 "NYCB를 보러 간다"고 말할 때, 그 뒤에는 이런 이름들이 있다.
발레 입문자에게 NYCB를 추천하는 진짜 이유
발레를 막 시작했거나 관람 경험이 적다면 NYCB가 첫 세계 최고 수준 발레단으로 좋은 이유가 있다. 발란신의 작품들은 복잡한 스토리 없이 순수하게 몸의 움직임과 음악의 관계를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오히려 발레 기초를 배우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이 보인다.
바 작업에서 배우는 팔의 위치, 발의 각도, 플리에의 깊이 같은 것들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극적인 드라마에 정신이 팔리지 않으니까 동작 하나하나를 더 꼼꼼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매년 겨울에는 발란신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하는데, NYCB의 호두까기는 1954년 초연 이래 뉴욕의 크리스마스 시즌을 대표하는 문화 행사로 자리잡았다. 뉴욕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12월 코크 시어터 앞에서 줄을 서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발레가 일상으로 스며든 도시의 풍경이 어떤 건지 직접 느낄 수 있을 테니까.